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-프랑스 전쟁 (문단 편집) === [[프랑크푸르트 조약]] ===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종전 조약인 [[프랑크푸르트]] 조약을 체결하였다. 오스트리아엔 관대하였던 비스마르크였지만 프랑스는 앞으로 재기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* 자그마치 50억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요구하고, * [[17세기]] [[베스트팔렌 조약]] 전후로 지속적으로 조금씩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던 [[알자스-로렌]] 지방을 가져갔다.[* [[알자스]] 레지옹과 [[로렌]] 레지옹의 북부 (현 모젤 데파르트망)] 그러나 먼저 선전포고하고도 안방에서 처참하게 발렸다는 사실에 프랑스는 이미 큰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다. [[나폴레옹 전쟁|몇십 년 전]]만 해도 프랑스는 전 유럽을 석권할 정도로 유럽 최강급의 육군력을 지니고 있었고, 그 위력은 그때까지 의심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. 물론 프로이센이 [[18세기]] [[프리드리히 대왕]] 이래 유럽 최정예 육군 이미지는 있었지만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|나폴레옹]] 시대 이후 유럽 최고의 육군 ''La Grande Armée''(위대한 군대)에게 안방에서 제대로 참패한 적도 있었기에 프랑스에 비하면 평가가 좋지 못했다.[* [[메이지 유신]] 당시 일본도 1880년대 이전까지는 육군 모델로 프랑스를 채택했다.] 물론 나폴레옹이 몰락한 [[1814년]], [[1815년]] 두 번에 걸쳐 외국 군대에 파리가 털렸지만 여러 나라가 쳐들어 온 것이었고 이번엔 사실상 프로이센 1개국에 당했다. 이런 상황이었으니 당시 프랑스에 가해진 충격은 막대했다. 병력 손실은 프랑스가 35만 프로이센 연합군이 11만. 나폴레옹 전쟁 이후 극악의 출산율로 [[루이 14세]] 때 유럽의 [[중국]]이라고 불리던 물량이 정체된 반면 영국과 독일은 [[산업 혁명]]과 영아 사망률 감소로 100여 년 동안 3~4배씩 인구가 증가한 상태였다. 더구나 프랑스는 2차 [[산업 혁명]]이 일어난 [[중공업]](제철, 화학, 전기) 중 [[철광석]]과 [[석탄]] 생산이 빈약해 영국과 독일에 크게 뒤떨어졌는데 이것은 알자스-로렌의 상실이 영향을 미쳤다. 알자스-로렌은 자원이 풍부하고 중공업이 매우 발달한 곳으로 프랑스 유수의 중공업 기업들도 알자스-로렌에 있었다. 그야말로 '꿀땅'이나 마찬가지였다. 그런데 이런 중요한 곳을 독일에게 빼앗겼으니 프랑스의 중공업 성장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